은혜글/간증

영국 노예해방의 아버지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

윌리엄 윌버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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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윌버포스

1. 시대적 배경, 그의 역사 전기적 배경(부모환경, 재산, 성격, 학업, 종교, 친구, 질병, 캐릭터, 생애...)

1759년 8월 24일 출생, 명문대 캠브리지 졸업,

그는 부유한 요크셔 상인의 아들이었다. 부유한데다 학식이 깊었고 기지가 넘치며 노래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며 연설솜씨도 뛰어났기에 당대 인물 중 윌버포스만큼 재미있으며 매력적인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깊은 확신, 인내, 부지런함, 그리고 풍성한 상상력을 지녔던 탁월한 정치인.

그를 이야기할 때 다양한 자선활동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한때 적이었던 사람들까지 자기편으로 만들어버리는 윌버포스의 성품이었다. 유럽 최대의 지성들과 교류를 나눴던 소설가 마담 드 스탈은 윌버포스를 일컬어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훌륭한 대화상대”이자 “영국에서 가장 총기가 넘치는 사람”으로 평가했다.

개인은 물론 파벌간의 의견 차이가 너무 첨예해서 걸핏하면 결투가 벌어지곤 하던 시대에 그는 철학적 반대파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일할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에드먼드 버크는 윌버포스의 의회연설을 능가할 수 있는 이는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웅변가들일뿐일 것이라고 했다. 이는 당대의 주도적 웅변가로서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고 있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최고의 칭찬이었다.

윌버포스는 그 삶과 정신적 유산을 통해 왕과 대통령과 온 세상의 홀대받는 사람들의 삶에 크게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고 당대의 유럽 궁정은 물론 미국 땅에도 이 사실은 잘 알려졌다. 1858년에 에이브라함 링컨은 남학생들이라면 윌버포스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 수상 ㅡ렌빌 경은 윌버포스 생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장차 태어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며 감사할 것이다.”

윌버포스는 160센티미터의 신장에 85센티미터의 가슴둘레의 작은 체구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위트와 해학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했고, 어떤 장소에서든지 화제를 주도할 정도로 탁월한 사교술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그의 노래 솜씨는 천하일품이었는데, 영국 황태자는 그의 노래를 듣고 반한 나머지 “윌버포스가 노래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것이다”라고 윌버포스의 노래솜씨를 극찬했다.

저술가 매컬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가장 부드럽고 가장 우아한 억양의 목소리, 그의 다정다감한 마음씨, 친절한 태도, 반짝이는 기지를 기억했다. 이 모든 것이 그를 가장 유쾌한 동무로 만들어주었다. 윌버포스는 아주 친절한 친구였고, 나는 그를 많이 사랑했다”

진정한 거인 윌버포스는 1833년 7월 29일 새벽 3시에 조용히 눈을 감고 74세의 생애를 마감했다.

윌버포스는 20년 동안 영국의 노예무력제도 폐지를 위한 싸움을 주도해 왔고, 1807년 마침내 이 싸움에서 떠나기 바로 며칠 전에 노예제도 자체가 영국 식민지 전역에서 마침내 폐지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명제가 마침내 승리한 것이다.

윌리엄 윌버포스의 삶과 성품을 칭송하며

벤자민 휴즈

무혈의 영웅 한 사람을 소개한다.

그는 살육을 일삼는 군대지도자도 아니었고

많은 나라를 폐허로 만들지도 않았다.

그를 위해 개선문이 세워지지 않았지만

그는 군대가 아닌 다른 영역,

더욱 숭고한 영역에서 월계관을 썼다.

그는 대중들의 박수갈채를 갈망하지 않았고

그에게는 정치인들을 섬길 시간이 없었다.

그는 강도당하고 옷을 벗기운 사람들의 친구였다

단연코 현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 중의 하나요

악습폐지라는 쾌거를 이룬 헤라클레스였다.

2. 당대 사회를 보고 그가 지닌 문제의식(노예무역)

영국 해양강국, 해군력으로 세계를 위협, 무역선

1757년 영국은 플래시 전투에서 인도에 대한 영국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1760년에 이르러서는 프랑스령 캐나다와 스페인령 플로리다까지 정복하여 영국의 영토로 삼았다. 1740년까지만 해도 영국은 서인도 제도와 북아메리카에 무역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별도의 많은 식민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영국이 전 세계적으로 영토를 가진 제국이 되었다.

18세기 말, 세계 최고의 해군력과 상선들을 갖고 있던 영국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잡아 북미 대륙으로 실어 나르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200년 전, 영국은 세계 제일 가는 노예무역국이었다. 영국 선박들은 서아프리카의 해안으로 가 직접 사로잡거나 아랍상인들에게서 사거나 마을의 추장들과 교환하거나 노예들을 배에 실었다. 종종 추장들은 그들 자신의 마을이나 이웃 마을 주민 전부를 팔기도 하였다. 영국 장교들은 무자비하였다. 어떤 영국군 우두머리는 노예선 선장들이 도착하자 자기 요새에 있던 아프리카 손님들을 100명씩이나 일거에 넘겨주기도 했다. 노예 사냥꾼과의 싸움에서 패해 사로잡힌 흑인 가운데 많은 이는 수치와 공포 때문에 배에 태워지기 전에 자살을 시도했다.

노예들을 일단 잡히면 배가 도착할 때까지 노예 수용소에 갇혀있어야 했다. 모든 노예는 노예선에 실리기 전에 그를 구입한 회사의 낙인이 찍혔다. 건강한 노예들은 새 주인의 낙인을 받아 따로 분류되었고 늙거나 불구인 노예들은 쓸모가 없다며 죽였다.

한 달에서 길게는 1년 정도 머물면서 노예선에는 끌어온 노예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채찍에 맞아가며 통나무 배를 탔다. 그 배를 타고 파도를 헤쳐나가 노예선에 올랐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족쇄를 채운 채 갑판에 결박되어 75센티의 높이, 1.8미터의 넓이와 어른이 앉아 있기도 힘든 공간에서 인간짐짝처럼 채워졌다. 150톤짜리 배에 종종 500명이나 되는 많은 노예들이 실리기도 했다. 강제징집되어 복무 중인 승무원들은 대체로 여자노예들을 마음대로 욕보였다.

노예값을 많이 받으려면 건강해야 하므로 노예들은 갑판에 나가 채찍의 위협을 받으며 억지로 뛰어야 했다. 날씨가 나쁘면 몇 주일이라도 계속 자신들의 오물 속에서 뒹굴어야 했는데 그 더러운 냄새가 멀리 1킬로 밖까지 진동했다. 노예들에게는 쌀죽, 옥수숫가루, 감자 스튜 등이 하루 두 번씩 주어졌는데, 항해가 악천후 등으로 지연될 경우 배급량은 당연히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심각한 질병에 걸려 질병의 고통과 학대를 견디지 못한 자살, 폭동 등으로 배가 미국이나 서인도제도에 도착할 때쯤이면 10%~25%가 중간에 죽어 대서양 바다에 버려졌다. 얼마나 많은 노예들이 수시로 버려졌는지 상어들은 노예선이 뜨기만 하면 그 뒤를 따랐다.

도착하면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하여 2-3일 걸려 말쑥하고 건강하게 보이려고 기름을 바르고 상처를 교묘히 위장했다. 발가벗겨진 채 거리를 행진한 후 경매에 붙여졌다. 건강한 노예는 40파운드 정도, 병들고 부상당한 노예는 여자나 아이와 한 묶음으로 묶여서 값싸게 팔렸다. 가족은 흩어졌고 심하게 병들어 팔리지 않으면 부두에서 죽어갔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순화교육”이라고 이름 붙여진 새 주인의 혹독한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3분의 1이 죽었다.

더운 나라에서 온 그들은 추운 날씨와 온갖 전염병이 창궐하는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사탕수수를 설탕으로 정제하는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설탕은 달콤함을 상징하는 식품이다. 그리고 현대인이라면 단 하루도 설탕 없이 살아가긴 어렵다. 그런데 이런 설탕이 우리 입에 들어오기까지 거쳐야 하는 과정 또한 그렇게 달콤할까? 이러한 가마솥 작업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고온에서 이루어졌고, 그 결과 신대륙에 도착한 노예 가운데 다시 30퍼센트 이상이 수년 내에 죽었다.

콜럼버스(Columbus)가 처음 신대륙을 발견한 후 유럽인들의 신대륙을 향한 욕망은 끝이 없었다. 처음 신대륙에 건너간 이들은 은광 개발에 나섰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유럽인들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순진했고 다루기 쉬운 대상이었다. 그들은 1500년 무렵부터 불과 150여 년 사이에 1만 6000톤이 넘게 은을 캐냈는데, 이 은의 대부분은 중국 도자기와 비단, 인도 향료 등을 구입하는 데 썼다.

은광 개발에 몰두한 나머지 은광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되자 이들은 다시 담배와 커피, 사탕수수 등의 작물 재배에 눈을 돌렸다. 특히 유럽인들의 혀를 자극한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 재배는 무역상들에게 막대한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작물 재배에는 엄청난 인력이 필요했으니 처음에는 신대륙의 인디오들이 노예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인간을 기계처럼 다루는 일이 쉽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유럽산 전염병에 걸리거나 강제노역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상인들은 이제 다른 인간 부품을 필요로 했다. 이때 떠오른 것이 아프리카 흑인들이었다.

처음 흑인 노예에 뛰어든 것은 포르투갈이었는데, 그 뒤를 이어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가 속속 대열에 참여했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던 노예무역은 영국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1770년에 영국의 선박들은 서아프리카에서 수출되고 십만 명의 노예들 중 절반 이상을 실어 날랐다.

이렇게 이루어진 노예무역을 가리켜 삼각무역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노예 무역선은 유럽에서 가까운 서남아프리카의 황금해안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한 노예선은 해안에서 가까운 부락의 추장에게 별 쓸모없는 물건들, 이를테면 총과 술, 보석 등을 건네고는 정박을 허가받았다. 정박이 시작되면 노예 사냥꾼들은 노예사냥에 나서는데 당연히 흑인들의 반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신 무기로 무장한 그들에게 활과 창으로 대항하는 이들이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노예무역에 종사한 자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가득 싣고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향한 상인들은 이들을 그곳 농장주 등에게 넘기고 대신 설탕과 담배, 럼주 등을 가득 싣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삼각무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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